항상 찬이 말이면 허허 웃어 주던 원우가 같이 살면서 살벌하게 화낸 적이 딱 한 번 있었는데, 그게 찬이가 임신한 사실을 숨겼을 때였으면 좋겠다.
자기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원우한테 말했을 때 가끔 다른 사람한테 보이던 무표정한 모습이나 그래서? 같은 무심한 대답이 나올까 봐 무서워서, 그리고 아직 젊은 형 앞길을 막을 수 없다는 생각인 찬이. 콘돔 없이 했던 날 이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걱정돼서 해 봤던 테스트기는 두 줄이 찍힌 채로 서랍에 처박히게 됐다. 그리고 그 테스트기는 찬이 손에 처박힌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원우가 발견하고, 보자마자 원우는 본능적으로 찬이구나, 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날 저녁, 원우의 제안으로 외식하고 들어온 둘. 자기 전에 이야기 좀 하자는 원우 말에 둘은 나란히 소파에 앉았다. 바쁜 저 때문에 혼자 말 못하고 끙끙 앓고 있던 건 아닐까 싶어 요새 고민이나 형한테 하고 싶은 말 없냐며 떠봤지만 찬이는 그저 고개를 휘휘 내저을 뿐이었다.
진짜 없어?
점점 살벌해지는 분위기에 찬이는 에이, 형 왜 그래요. 꼭 있어야 하는 것처럼 말한다? 하며 팔을 툭 치고 장난을 걸어도 원우는 웃지 않았다. 등 뒤로 식은 땀이 줄줄 흐르는 기분인데, 이 형이 왜 그러는지는 도저히 모르겠네........
그때 찬 앞으로 원우가 던지듯이 테스트기를 놓았고, 원우는
설명해.
딱 한 마디만 내뱉고 안경 너머로 찬이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찬은 그 눈빛에 덜컥 무서워져서 눈가로 열이 확 몰렸다. 집 밖으로 나가서 버리고 올걸. 아니, 없이 해도 괜찮다는 말만 하지 않았어도. 자신의 집과 비교도 될 수 없게 높던 원우네 집 담장, 다정하셨던 어머님의 고운 손, 원우와 사귀고 난 이후 생전 처음 받아 본 비싼 생일 선물까지. 분명 원우가 지금 찬의 머릿속을 볼 수 있었더라면 또 쓸데없는 생각 중이냐며 아프지 않게 꿀밤을 놓았을 거다.
정적 속에서 점점 크게 들썩이며 우는 찬이를 원우는 안아 주지 않았다. 결국 소매로 눈가를 꾹꾹 누르며 임신했다고 실토하는 찬이.
형이, 싫어할 것, 같, 아서......
차마 말 못했어요. 어렵사리 끝낸 말 끝에 돌아오는 건 원우의 허탈한 웃음뿐이었다. 너는 내가 못 미더운가 보네. 서로 다른 이유로 상처받은 둘. 결국 원우는 먼저 일어서서 방으로 들어가 버리고, 찬 혼자 소파에 남아 무릎에 얼굴을 묻은 채로 숨죽여 울었다.
얼마 안 있어 눈치 보는 얼굴로 들어올 찬이를 생각해서 등 돌린 채 벽 보고 누워 있던 원우는 두 시간이 지나도록 열리지 않는 방문을, 정확히는 방문 너머에 있을 찬을 걱정스럽게 쳐다봤다. 어쩔 수 없이 이불 속을 박차고 나와 불편한 자세로 구겨져 잠든 찬이를 깨지 않게 조심스럽게 안고 방으로 들어왔다. 손에 물은 묻혀도, 눈에는 눈물 안 묻게 해 준다고 했는데. 인터넷에 떠도는 흔한 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꺄르르 웃으며 반지를 받아 주던 모습이 자는 찬의 얼굴 위로 겹쳐 보였다.
잠도 안 오고...... 베란다에서 담배나 피울까 하다가 이제 끊어야 된다는 생각에 코트 주머니에 있던 담배까지 모두 꺼내 쓰레기통에 버렸다. 하릴없이 티비만 켜 놓은 채로 날이 밝아 올 때까지 앉아 있다 패딩만 챙겨 입고 밖을 나섰다. 마트에 들어서자마자 과일 코너로 곧장 걸어간 원우는 먼저 누나가 임신했을 적의 기억을 살려 딸기, 오렌지 등을 카트에 담고, 또 찬이가 잘 먹었던 것들만 찾아 담다 보니 어느 새 두 손 가득이었다.
출근하기 전, 원우는 자신이 손질한 딸기를 안방 탁자에 올려 두며 아직까지 곤히 잠든 찬의 이마를 쓸어 주었다. 반차 쓰고 바로 들어올 생각이라 잠시 떨어져 있는 건데도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찬이 눈을 떴을 때는 안방 침대 위였다. 이불은 목까지 꼭꼭 잘 덮어져 있는 상태였고, 익숙한 방 안인데도 이리저리 둘러보다 마주친 탁자 위에는 잘 씻겨져 꼭지까지 손질되어 있는 딸기가 담긴 그릇이 놓여 있었다.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울컥함에 또 한 번 엉엉 울어 버릴까 하다가 뱃속에 있는 -아직 아기라고 하기도 힘든 수준이지만- 아기까지 힘들까 봐 배를 토닥거리며 침대에 걸터 앉아 원우가 챙겨 줬을 딸기를 먹고 일어섰다.
사과에, 오렌지에....... 이제 잘 챙겨 먹어야 되겠다는 생각에 냉장고를 열자 사과 하나가 데굴데굴 굴러나올 정도로 안은 온통 과일뿐이었다. 과일만 먹고 살라는 벌인가? 일단 정리부터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하나씩 꺼내려는 순간, 도어락이 풀리며 작은 봉투를 든 원우가 들어왔다. 떡볶이 먹을래?
원우의 누나는 임신했을 동안 떡볶이를 즐겨 먹었다. 떡볶이도 엄마나 남편이 해 준 건 입에 대지도 않았다. 꼭 시장에서 파는 떡볶이만 고집했기 때문에 원우는 한때 모든 임산부의 태교 음식이 떡볶이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 생각으로 사 온 떡볶이지만 순대에 국물을 콕 찍어 우물우물 씹는 찬이도 가리지 않고 잘 먹는듯 했다.
이거 다 먹고 병원 가자.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찬이는 켁켁댔고, 원우는 허둥지둥 주방으로 달려갔다. 천천히 먹어야지, 찬아. 한 손으로는 물이 든 컵을, 다른 한 손으로는 등을 토닥여 주자 그제서야 진정한 찬이 말없이 원우를 쳐다봤다. 원우는 그 눈빛에 한순간 죄인이 되는 기분이었다. 설사 자신이 죄인이 되더라도, 찬의 상태가 더 중요했으므로 이번만은 물러서기 어려웠다.